도심 속 나의 작은 숲으로

 

올해 개봉한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나의 ‘작은 숲’은 어디일까 생각해봤다.

나는 그저 도심 변두리의 작고 누추한 방에서 나무가 준 선물에

무수한 문장들을 적어내고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고 살고 있으니 내 방을 ‘작은 숲’이라 부름에 과장은 없겠다.

글쎄, 나무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같은 ‘작자’야말로 숲파괴자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도시는 도시대로, 시골은 시골대로 장단이 있겠지만 나는 아직 도시를 벗어나는 게 두렵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골목들과 판에 찍어낸 듯 닮은 다세대주택들,

그 안의 익명의 공간에서 아무개씨로 살아가는 삶이 내겐 너무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이다.

 

북서울 꿈의 숲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의 모든 생애를 시골서 살았으므로

때때로 자연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와 니어링 부부의 마음이 되어 자연 속의 삶이 얼마나 가치있는지를

되새겨보지만 잠시 뿐이다.

 

등하교를 위해 걸었던 마을 길은 어린 사색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나는 그 시간이 오늘날의 ‘나’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믿는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러나 그와 별개로 시골에서의 인간관계를 보자면

많은 사람들이 거칠고 이기적이며 무지했으며 때론 악했다.

아버진 ‘목에 깁스하고 다니는 마을 아이들’의 버르장머리를 매우 언짢아하며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인사의 중요성을 설파했으므로 나는 누구에게나 인사를 하고 다녔는데

상대어른이 누구냐에 따라 때때로 그 인사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말한 버르장머리들의 부친들 역시 인정머리없고 고약하기는 매한가지라고 생각했으므로.

 

이웃과 가까운 시골의 삶은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는 도시의 삶보다 더 쉽지 않다고 느낀다.

한편, 사람과 얽히지 않은 자연속의 유일자로서의 삶 또한 두려운 건 매한가지니

도무지 시골에서의 삶이란…..

 

북서울 꿈의 숲

 

그리하여 나의 차선책은 도시에 살며 도시의 숲을 찾는 것.

도시에서 숲을 찾는 일이 어렵진 않다.

내가 도보로 걸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숲은 다소 멀지만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면 최소 1시간에서 2시간 사이로 도착할 수 있는 숲들이 있다.

 

숲도 도시를 닮아 아주 잘 정돈되어 있다.

나무뿌리에 걸리거나 푹패인 웅덩이에 빠질 일은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도시의 숲 답게 나무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줘야 하는 숲도 많다.

개방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거의 모든 숲이 그렇지만 홍릉숲이나 창덕궁 후원처럼

예약을 해야지만 방문할 수 있는 숲도 있다.

 

창덕궁 후원

 

그래서 도시의 숲에서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낄 일이 없다.

비오던 날, 무모하게 들어선 제주의 곶자왈서 느꼈던 두려움을 기억한다.

숲은 실로 울울하고 어두워서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는데 그날의 공포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머릿 속에 각인되어 있다. 하여 내겐 선한 초록의 숲과 동시해 음흉한 칠흑의 숲도 존재한다.

도시의 숲은 선한 초록의 숲이나 그것은 곧 ‘야생성을 잃은 것’ ‘인공의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서울 월드컵 공원

 

손을 많이 탔든 덜 탔든 간에 도시의 숲은 도시인들에게 최선을 다해 온정을 베푼다.

도시에서 가장 걷기 좋은 장소를 찾을 때에  대중교통의 운임비를 들여서라도 숲으로 향할 수 밖에 없다.

비록 인기가 많은 몇몇의 숲에선 같은 목적으로 방문한 도시인들과 어깨를 부딪힐 확률도 없지 않겠지만

적어도 자동차와 오토바이, 도보의 각종 장애물들과 도시 매연에서 해방될 수 있음에 걷기가 수월해진다.

한편 나무들은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뿌리에 사람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금 더 맑은 공기를 내뿜을 수 있도록.

어쩌다 인간의 등이 기둥을 탕탕 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서울 월드컵 공원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모국어의 여러 글자들 중에서 ‘숲’을 편애한다.

‘수풀’도 좋지만 ‘숲’만은 못하다. ‘숲’의 어감은 깊고 서늘한데, 이 서늘함 속에는 향기와 습기가 번져 있다.

‘숲’의 어감 속에는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건조감이 들어 있고, 젖어서 편안한 습기도 느껴진다.

(중략)

‘숲’의 피읖받침은 외향성이고, ‘숨’의 미음받침은 내향성이다. 그래서 숲은 우거져서 펼쳐지고

숨은 몸 안으로 스미는데 숨이 숲을 빨아 당길 때 나무의 숨과 사람의 숨은 포개진다.

몸속이 숲이고 숲이 숨인 것이어서 ‘숲’과 ‘숨’은 돌일한 발생 근거를 갖는다는

나의 몽상은 어학적으로는 어떨는지 몰라도 인체생리학적으로는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 김훈, <자전거여행>, ‘숲은 숨이고, 숨은 숲이다-광릉숲에서’

 

숲을 말 할때 언제나 인용하는 김훈의 문장들은 숲을 이루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마냥 아름답고 고귀하다.

 

서울 안산 둘레길

 

한편 김훈이 찬양한 광릉숲은 내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못한데

이는 숲 때문이 아니라 그날의 내 몸 컨디션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한창 스트레스를 받을 때였는데 스트레스를 받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고

그것이 하필이면 숲을 찾은 날 최고조에 이르러 푸르른 나무들도 나를 어쩌지 못했다.

숲에 가면서 작은 주전부리 하나 챙기지 않아 배가 고픈채로 그 숲을 돌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숲을 나온 직후부터 체끼가 올라오듯 속이 메슥거리고 두통이 시작됐다.

그러고 몇 시간을 앓았나 모르겠다.

그리하여 광릉숲은 내게 이렇다할 인상을 남겨주지 못했다.

자연과 나 사이의 에너지는 동등한 값으로 오고간다고 생각한다.

나도 숲에게 줄 기운이 있어야 숲도 내게 힘을 줄 수 있다.

광릉숲은 머지 않은 시일에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서울 안산 둘레길

 

홍제동에 살 적엔 숲이 꽤나 가까운 편이라 이따금 걸어서 안산 둘레길을 걷곤 했다.

마포에 사는 아는 화가 한 분은 자주 안산을 찾아 적당한 자리를 찾아 그림 그리는 시간을 즐긴다고 했다.

과연 안산은 숲 그대로의 자연스러움과 그 자연스러움을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의 인공적임이

나름의 조화의 이루고 있다. 사실 도시와 자연이 공평한 비율로 균형을 맞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거대한 익명의 공간에서 숲보다 건물이 중요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에.

그러니까 나무 뒤로 숨는 건 어림도 없다.

이중 삼중의 철통보안을 한 건물의 사각형 안으로 들어가야지만 완벽하게 숨을 수 있다.

 

서울 강서둘레길

 

겨울의 도시 숲은 쓸쓸하지만 나름의 운치가 있다.

이미 녹아 사라진 거리의 눈을 이곳에서만큼은 가장 오래 두고 볼 수 있다.

겨울의 도시 숲은 도시가 부여잡은 사계절 자연의 마지막 풍경이다.

 

인천 월미산 공원

 

도시의 숲마저 따분해질 때에 도시 변두리의 숲을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가령 인천 월미도의 월미산은 놀이공원과 바다를 볼 수 있는 야트막한 숲이다.

나무숲 사이로 수평선과 대관람차를 조망한다는 특별함은 대개의 도시의 숲에선 경험할 수 없다.

 

인천 중앙공원

 

어느덧 장마가 시작됐고 장마를 핑계삼지 않더라도 최근에는 통 숲에 간 일이 없다.

숲에 가서 깊은 숨을 좀 마시고 와야겠다.

 

숲을 제목으로 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

Seunghye Yoo

걷고 쓰는 사람 https://blog.naver.com/ysh3208 [저서] -쉼표,경주 -쉼표,강릉 -쉼표,군산 -쉼표,제주 -쉼표,앙코르와트 -같이 오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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