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로로 간다

우리는 종로로 향했다. 

꼭 종로는 아니어도 괜찮았다. 

을지로든 광화문이든 그 근처면 충분했다. 

남산터널을 지난 버스가 퇴계로에 가까워질 때

우리는 거의 동시에 “이제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서로 어이가 없다는 듯 낄낄 웃었다.

 

J와 내가 압구정서 점심을 먹은 날이었다. ‘브레이크 타임’이라며 퇴장을 종용하는 어느 프렌치 레스토랑서

쫒겨나온 우리는 하릴없이 도산공원을 한바퀴 돌았다. ‘근처 카페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얘기를 이어가자’고

했지만 지천으로 널린 카페를 눈앞에 두고도 둘 중 누구도 선뜻 어디로 들어가자 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대안이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말로만 듣던 그 도산공원이냐’며.

우리는 공원 내 기념관으로 들어가 약 13분에 걸쳐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일대기 영상을 감상했으며

선생이 배 위에서 하와이 섬을 보고 ‘도산’이라는 호를 지었다는 것과

현업 여행작가인 나보다 훨씬 많은 세계 도시들을  여행했다는 인상적인 사실을 접했다.

 

 

공원을 나온 우리의 기분은 여전히 어색했다.

우리의 기분은 둘째치고 그 골목에서 ‘걷는다’는 행위가 어색했다.

암묵적으로 약속된 ‘뚜벅이 진입금지 구역’과 같았달까.

우리가 지나던 길목에 서 있던 빈 택시는 우리가 당연히 탈 거라고 예상한듯

‘타지 않고 뭐하냐’는 신호를 보냈다. 경적을 울리진 않았는데도 우리는 그 ‘신호’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신호는 마치 “뭐라고? 여기서 걷겠다는거야?” 처럼 느껴졌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는 사람들 좀 봐. 자세부터가 달라.”

‘강남 바이브’는 단순히 옷차림의 문제는 아니라는데 우리는 동의했다.

북쪽으로 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합의를 보고 한강을 건너는 버스를 잡아탔다.

 

나는 강남스타일이 아니어서..

 

서울서 강 아래 쪽이라면 내가 살고 있는 남서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불편하다.

특히 강남으로 통칭되는, 그중에서도 압구정, 청담, 신사, 논현 지역이 그렇다.

이유를 대면 꽤 여러가지다.

그러나 그 지역이 불편한 이유보다는 종로 일대가 편한 이유를 대는게 더 명료하고도

즐거운 일일 것 같다.

 

장군님을 보면 마음이 편하다

 

우리는 언제나 종로에서 만났다.

나와 J뿐 아니라 K도 L도 A도 H도 그 모두를 종로에서 만났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종로’라 칭할 수 있는 범위일까.

종로는 광화문 교보문고가 위치한 1가에서부터 흥인지문(동대문)이 위치한 6가까지 이어진다.

아주 긴 거리다. 교보문고부터 흥인지문까지 걸어가려면, 글쎄 한번도 시간을 계산한 적은 없지만

성인걸음으로 1시간은 잡아야 하지 않을까. 청계천변을 따라 걷는다면 조금 더 빨리 갈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나는 교보문고에서 J를 만난 적도 있고 지금은 종로서적이 된 반디앤루니스에서 K를 만난 적도

있으며…. 아니 이런 얘긴 좀 시시하다.

‘꿀타래’와 ‘국문학개론’을 양손에 들고 다니던 순수했던 시절에

웨이터들에 의해 반강제로 지하 나이트클럽에 끌려들어간 적도 있었고

(소파에 앉자마자 그대로 뛰쳐나왔는데 그때 왜 그랬나 싶네.)

그로부터 몇 살 더 먹은 어느 시절에는’맥주창고’ 단골이 되어 춤추고 마시던 시기도 있었다.

(맥주창고라니. 그 이름부터가 싸이월드 별빛로긔체처럼 조금 부끄럽네.)

이런 얘기도 좀 별로다.

 

 

빠이롯트 만년필 간판 근처에 구시대 유물로 남겨져 있던 종로서적 간판 얘긴 어떨까.

엄마가 근무했던 종로서적이 유일하게 남긴 흔적을 보면서 22살쯤의 엄마를 상상하는 일 같은 건?

한때 전국서 가장 큰 서점에서, 외서부 직원으로 이따금 외국인들을 고객으로 만나고

동료 직원들과 삼삼오오 모여 태극당(당시에 종로2가에 있었단다)에서 빵을 뜯으며 수다를 떨던,

AFKN을 들으며 영어 회화를 익히던.. 그랬던 아가씨를 말이다.

나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한참을 더 자리하던 그 간판을 볼 때마다 엄마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태어난 이후의 엄마는 줄곧 시골에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도시의 아가씨로 젊은 엄마를 그리는 일은

꽤 새롭고 재밌는 일이었다.

 

 

22살의 엄마가 걷던 거리를 22살의 내가 걸을 때에,

그때에 나는 1920~30년대 모더니스트들을 접했다. 그래봤자 지금 머릿속에 남는 건

제비다방, 금홍이, 멜론, 미츠코시백화점 옥상정원, 천변풍경, 구보씨 같은 큼직큼직한 키워드들이 전부지만-

어쨌든 당시 경성 힙스터들의 본거지는 종로였으며

보신각과 마주한 화신백화점에, 거리에 즐비한 다방과 카페에 우리 모두가 아는 이상과 박태원이 있었다.

종로를 걸으며 나누던 우리의 수다는 구보씨 얘기를 하다가 그의 외손자 봉준호의 영화 얘기

(심도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우들의 가십거리들을 주로 한)로 새곤 했다.

그러다 영화를 볼까, 서울극장을 갈까 피카디리를 갈까 그런 고민을 했다.

나는 또다시 생애 첫 극장이 서울극장이었다고 의미부여를 하기도 하고.

 

 

그리고 사내들…

나는 몇 명의 사내들과 청계천변을 산책 했을까.

청계천 뿐일까. 한때 ‘우리’로 묶인 너와 나는 덕수궁 돌담길을, 창경궁 돌담길을,

광화문에서 대학로까지 사직동에서 창신동까지 참 많이 걸었다.

음, 그렇다. 지루한 얘기다.

 

30년대 모더니스트들 얘기가 덜 지루할까 아니면 한 개인의 고리짝적 연애담이 덜 지루할까.

서너걸음에 하나씩 그 자리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시작해 흥인지문까지.

눈 앞에 보이는 건물, 골목, 교차로, 가로수… 그 모두에 나의 15년, 그 모든 계절이 있다.

굳이 쓸 필요도 없이 역시 싸이월드의 흑역사 같은 촌스런 시간들이다.

종로서적의 간판은 끝내 사라졌고

보폭을 맞추려 노력하던, 이따금 손등이 스치던 사내들도 사라졌다.

 

그러나 종로는 여전하다.

그 사내들과 이별을 말할 때마다 ‘언제나 내편’이 되어주던 동무들도 여전하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새로운 종로서적이 들어섰고 나는 언제나 그러하듯 교보문고->영풍문고->종로서적 순으로

서점을 돌아보고 마음이 동하는데로, 가끔은 서촌으로 때로는 북촌으로 향한다.

가끔 홍제동 추운 집이 그리울때가 있다.

그 집서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을 돌아 종로로, 긴 산책을 하곤 했다.

이제 종로까지 걷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할 동네에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종로로 간다.

참,

그래서 종로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은 J와 나는 늘 가는 카페에 갔고

또 같이 전철을 타고 1시간이 넘는 귀가길에 올랐다.

 

Seunghye Yoo

걷고 쓰는 사람 https://blog.naver.com/ysh3208 [저서] -쉼표,경주 -쉼표,강릉 -쉼표,군산 -쉼표,제주 -쉼표,앙코르와트 -같이 오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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